최근 들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의지를 표현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것을 알리고
억울함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더 이상 현실에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 가까운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경험한 적은 없다.
그리고, 나 또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죽는다는 것을 선택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든다. 다만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있다.
'정말 많이 힘들고 아팠었구나'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많이 아프고, 힘들고 괴로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감정을 더 이상 살아 숨쉬며 견디기가 힘들어졌을 때,
죽는다는 것을 방법으로 떠올리지 않았을까. 결국, 그들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것은 현실의 고통을 멈추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길이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죽음이라는 방법 만으로 자신들의 고통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이 너무 슬프게만 느껴진다.
더는 그런 상황이 지속되지 않도록, 주변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그들을 감싸주고,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은, 사실 원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범죄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도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위로해주어야 하느냐는
원망섞인 주장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범죄자들에게도 자살을 하지 않도록 위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한다거나, 사형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범죄자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많은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생각이다. 만약,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가.
(1) 너가 나의 소중한 사람을 죽였으니, 너도 이 세상에서 죽어 사라져야 한다.
(2) 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당신은 자살할 권리가 없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3) 당신이 저지른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되었는지를 반드시 꺠달아야 한다.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고통받고, 자신의 행위가 만들어낸 다른 사람의 슬픈 감정을 반드시 알게 되어야 한다.
(1)~(3)의 생각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범죄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통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차이가 생기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고통의 강도와 지속성이다. (1)의 경우 짧은 시간에 고통이 극대화되어 경험하게 된다. 사형수의 기록을 읽어보면, 그들은 매일 자신이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와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고 한다.
(2)의 경우엔 죽음의 공포는 (1)에 비해 약할 수 있지만, 신체적으로 자연사할 때까지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종신형을 선고 받아 평생을
감옥 속에서 노역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2)의 입장의 예시로 보고 있다.
(3)의 경우에는 문장 자체에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
고통의 강도와 지속성에 초점이 있기 보단,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잘못된 행위임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지각하는 고통을 겪어양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다시 돌아가서, 나의 입장은 사람들이 (1)과 (2)의 입장을 계속해서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통해 상처를 받게 된 우리들 역시, 언젠가는 상처가 치유되어 고통 속에서 해방되는 시기를 맞이해야만 한다.
슬픈 경험을 겪었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죽을 때까지 고통스러워 진다는 것은, 개인에게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과, 그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로 인해 고통받게 된 사람들 모두에게 그나마 덜 불행해지고, 언젠가는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만큼 마음 상태가 회복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방법을 고민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모두가 살아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죄를 뉘우친다거나,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결코 인정받아서는 안된다.
그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 받던 사람의 마음이 치유될 것이라고는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살아 있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 상황에서 법의 처분, 여론의 질타를 받을 부분이 있다면 드러내어 공개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걸릴지라도, 잘못의 공개로 인해 자신을 좋아해주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더라도
죽음으로 자신의 죄를 갚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며, 살아가며 자신이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어렵겠지만,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아무리 뉘우치더라도, 절대로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분위기를 조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영원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가기는 어렵다. 그러한 잘못 중에는, 정말로 심각해서, 영원히 용서가 어려운 일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잘못의 강도가 클수록, 우리는 역으로 그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선택권을 누릴 수 있게 해서는 안된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죽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그보다는, 가장 먼저 사회와 구성원의 협력으로 사람을 고통받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모두가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고,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죽음이 아닌 보다 나은 방법으로 잘못에 대한 뉘우침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많은 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 어렵지만 다시금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겐 죽음을 선택하지 않게끔,
죽는다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쳐 자신 스스로가 저지른 일에 대해 고통받아야 하며
우리는 개인과 사회가 위와 같은 방법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스스로의 생각과 여론을 조성하여야 한다.
그리고, 고통의 시간 속에서 반성과 뉘우침은 시간은, 언젠가 끝이 날 수도 있는 사안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여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금 사회 속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부터 마음을 먹을 필요가 있다.
길게 쓰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 속 한켠이 답답해지는 주제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나만 하더라도, 나의 소중한 사람, 그리고 나를 고통받게 만든 사람에게 내가 적은 글처럼 대할 수 있을까.
100%는 못할 것 같다. 다만, 그 사람에게 죽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면, 나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신이 얼마나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죽는 순간까지도 모른 채.
그저 죽어야 하는 자신의 억울함만을 생각하다 죽을 것 같아서이다. 그걸로 내 마음의 상처가 회복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확실한 반성과 뉘우침의 시간을 보내고, 자신이 상처를 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시간은 오래 걸리더라도, 나의 마음 속 상처를 회복하는 데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의 제도와 법이, 그리고 개개인의 생각들이 이런 방향으로 모아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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